2021년 삼성화재배는 박정환 9단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환은 어린 나이에 내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바둑 기사들(이세돌을 비롯한 80년대 초중반 기사들)을 밀어내고 랭킹 1위를 차지한 기사였기 때문에 나도 같이 그한테 밀려난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던 기사이다. 게다가 우리 세대를 밀어낸 그 후배가, 사실은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이가 들면서도 항상 성실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잃지 않고 훈훈한 외모를 가진 젊은이로 커가는 과정을 보면서 점점 호감을 갖게 됐고, 결정적으로 그 자신도 또 다른 후배한테 점점 밀려나는 모습에 옛날에 느꼈던 안쓰러움까지 더해지면서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사가 되었다.
그런 박정환 9단이 이번 삼성화재배를 우승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
1. 결승 진출 전 대진
사실 박정환 9단쯤 되는 기사가 대진운을 따지는 것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박정환 9단을 만난 기사가 대진운이 없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도 32강부터 대진은 아주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전기 우승자이자 이번 대회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중국 랭킹 1위 커제 9단은 일찌감치 32강에서 탈락했고, 중국 랭킹 2위 양딩신도 4강에서 신진서 9단 쪽에 배치되었다.
대 리웨이칭('00, 중국랭킹 8위) : 4승 1패 (최근 5국 : 승패승승승)
대 미위팅('96, 중국랭킹 5위) : 9승 6패 (최근 5국 : 패승패패승)
대 롄샤오('94, 중국랭킹 9위) : 2승 5패 (최근 5국 : 승패패승패)
대 자오천위('99, 중국랭킹 14위) : 4승 1패 (최근 5국 : 승승패승승)
* 괄호 안은 생년, 랭킹은 사이버오로, 전적(공식전 기준)은 한국기원 사이트 참조
하지만 세계대회 본선에 진출한 기사들이라면 다들 어느 정도의 고수들이기 때문에, 결승 진출까지 상당히 힘들었다. 특히 16강(대 미위팅)과 8강(대 롄샤오)은 거의 탈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패배 직전까지 몰리다가 기사회생했다. (아래 사진 참조)
고생했던 16강, 8강과는 달리 나름 수월하게 4강을 통과하였고, 드디어 대망의 첫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2. 결승전
박정환 본인이 우승 후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1국에서 너무 완패를 당했다. 바둑을 중계하던 해설자들도 이런 식이라면 신진서 9단을 이기기 어려우니, 뭔가 특단의 필살기라도 하나 준비해서 2국을 준비해야 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2국에서는 기대하던 필살기는 없었지만 반집을 다투는 팽팽한 접전 끝에 좌변 패를 통해 우위를 점했고, 그 우세를 계속 지켜나가는 마무리를 통해 승리. 시리즈 전적은 1:1 로 균형을 맞추었다.
1/2국을 통해 해설자들은 어지간해서는 균형을 잃지 않는 양 선수들의 바둑 내용에 놀라며 정말 세계 1/2위를 다투는 초일류 간의 대국이라는 것에 모두들 동의했다. 두 선수가 남긴 기보는 그만큼 빛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3국.
32강부터 쉼 없이 진행되었던 삼성화재배에서 단 한번도 상대에게 초반 우세를 내준 적이 없이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던 신진서 9단은 마지막 판에 이르러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대국 시작이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완착을 두며 초반부터 박정환 9단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49번째 수로는 아래 참고도처럼 먼저 상변에 선수 교환을 하고 씌워갔더라면 만만치 않았던 형세였다고 한다.
51번째 수로도 아래 참고도처럼 한 칸 정도로 씌워서 백에게 도망가라고 한 뒤에 A 나 B 같은 곳을 두면서 천천히 압박하는게 더 나았다.
실전에서는 이후 일련의 수순들을 통해 백이 중앙에서 선수로 완생한 뒤에 하변의 큰 자리를 선점하니, 흑은 중앙의 세력을 활용할 곳이 마땅치 않게 되며 전 판을 통해 비세에 계속 몰릴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박정환 9단은 형세 판단이 정확하고 한번 잡은 우세를 놓치지 않기로 유명한 기사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동안 신진서 9단에게 워낙 많은 패배를 당하다보니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는 순간 바로 패배로 이어진다는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104번째 수(아래 기보의 ▲ 표시)로는 A 로 상변 백돌을 안정시킨 뒤에 흑이 마지막으로 중앙을 키워갈 때 적당하게 삭감하면서 진행했으면 좀 더 쉬웠을 것이라는 평이다.
흑 입장에서는 백에게 중앙까지 머리를 내밀게 해줘서는 집 차이를 도저히 극복할 곳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신진서 9단은 마지막으로 상변에서 중앙으로 흘러 나온 백 대마를 쫓는 승부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마추어이자 돌을 죽이는 데 전문가인 내 입장에서도 저게 설마 죽겠어? 절대로 죽을 돌로는 안 보였는데,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국에 우승이 걸린 사활이다. 게다가 상대방은 수읽기 최강이라는 신진서 9단. 설마설마하는 가운데에서도 착수가 진행될 때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대마불사라고 하던가. 흑도 군데군데 약점이 있어 끝까지 사활을 추궁하기에는 무리였고 결국 백의 166수로 중앙에 있는 흑 7점과 하변 흑돌을 끊어가자 신진서 9단은 싹싹하게 돌을 거두었다.
166수 끝. 백 불계승.
올해 한국 나이로 29세. 아직 나이가 들어서 더이상 실적을 낼 수 없는 그런 나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바둑 기사로서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8강 진출자들 가운데 박정환 9단이 나이가 가장 많은 기사였다.
그동안 박정환 9단이 자리하고 있었던 랭킹 1위의 기간과는 걸맞지 않게 메이저 세계 대회에서는 이번 우승이 겨우(?) 5번째 인데, 앞으로도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우승 횟수도 늘리고, 신진서 9단과 함께 세계 바둑 패권을 다시 우리나라로 가져오는 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